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3] 좌파 농사꾼 정성헌 “두 아들 이름이 평과 화”

입력: ’19-10-14 16:30  /  수정: ’19-10-17 13:49
좌우 모두 대화 통하는 어른 “숫자 세고 인상 쓰는 운동 이제 그만”
“싸움은 조금 말린다. 서초동 집회나 광화문 집회나 할 얘기 다 했으니 그만 하라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얘기했다. ‘우리가 더 많이 모였네’ 다투는 건 애들 짓이다.”

정성헌(75)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지난 10일 강원도 인제 대암산 용늪 근처 서화리의 평화생명동산을 찾은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정 이사장은 11년째 평화통일 교육과 생명 운동을 일구고 있다. 지난 11일과 12일 서울신문 평화연구소 등이 후원하는 청소년 영상축제가 진행됐는데 미리 만나 하 수상한 시절 얘기를 나눴다.

정 회장은 1964년 강원 춘천고를 나와 196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카톨릭농민회를 이끈 ‘좌파 농사꾼’이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장도 지냈고 협동조합 운동의 원조 격이다. 20년 가까이 남북강원도교류협력위원회에서 일했고 2010~1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낸 데 이어 지난해 2월부터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이끌고 있다.

그와 함께 동산을 돌아보는데 금강산 방향으로 두 대의 탱크 ‘평화’와 ‘통일’의 포신이 뻗어 있는데 들꽃들이 꽂혀 있었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에 유익한 식물들을 심은 정원도 눈길을 끌었다. 용기가 참 대단하다고 말했더니 “어렵게 생각하면 한이 없다.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재미있게 해내면 된다”는 소신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1964년 6·3시위 때부터 한결같이 운동에 매진했고 지금도 좌우 어느 쪽으로든 대화가 되는 몇 안되는 어른이란 평가를 듣는데.

→ 기분 좋게 운동하자는 지론을 갖고 있다. 인상 쓰고 상대를 미워하는 운동은 오래 가지 못한다.

-평화생명동산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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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헌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 지난 10일 11년째 소중하게 일궈온 동산을 둘러보며 하 수상한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다섯 살에 6·25를 경험해 전쟁은 싫다, 평화가 좋다는 것이 논리 이전에 의식의 심층에 있다. 형제 이름을 외자로 ‘평’과 ‘화’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도 카톨릭 농민회 회원인데 카농 활동은 유신이나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민주화 투쟁과도 연결됐지만 그보다는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공존하느냐를 더 고민했다. 자연과의 공존이 최고의 평화다.

평화와 생명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절실한 것을 앞에 놓자는 뜻에서 한국전쟁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곳을 ‘평화생명동산’이라고 이름지었다. 하지만 기조는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자’는 것이다. 남북 평화도 한반도 생명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어야 한다. 군사적 얘기로 시작하면 군사적 얘기로 끝난다. 인간과 뭇생명이 어울려 사는 터전을 만들 수 있느냐로 대화의 기조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남북 및 북미 대화를 보면 갑갑함을 많이 느낄 것 같다.

→ 모순의 뿌리가 복잡해 착착 풀리지 않는다. 늘 길게 생각하고 내부 평화에도 주력해야 한다. 내부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교섭할 때 힘이 따르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은 이들은 통합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배제의 정치를 하게 되니 더 심해진다. 그런 점이 아쉬울 뿐이다.

외국과는 이익을 놓고 얘기하면 되고 타협할 수밖에 없고, 군사적 얘기만 하면 사정하게 된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화석연료가 바닥나면 생명이 깃들 수가 없다. 너희 북한은 시간도 많지 않고, 산에 나무도 없지 않느냐고 얘기해야 한다. 대개 군사적 힘의 관계나 논리를 얘기하기 시작하면 국제적 관계나 논리를 뛰어넘지 못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걸려도 근본을 얘기해야 한다. 바탕을 얘기하지 않고 DMZ 안의 GP를 없애면 기분은 좋지만 나중에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얘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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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헌 이사장은 금강산을 향해 뻗은 포신을 어루만지며 남북 및 북미 대화의 근본 패러다임을 생명 중심으로 바꿨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말씀대로라면 대화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겠다.

→ 그러면서도 패권 질서의 향방을 잘 봐야 한다.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당신의 임무는 이 지구를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게 지도자가 할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에게 그런 말이 먹히겠느냐고 회의하지 말고 그래도 해야 한다. 트럼프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나 생각하면 더 망가뜨리는 것이다.

한반도 생명공동체를 성심성의껏 추구할 때 일본과 중국의 괜찮은 사람들이 존경하게 된다. 아베의 턱도 없는 소리가 말발이 덜 먹히게 된다. 과거사를 갖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안 들어 싸움밖에 안 벌어진다.

아무도 못 사는 동네에 원자폭탄이 있으면 뭐하고, 개헌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만들었는데 기후 이탈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 김정은과 아베에게 얘기해야 한다.

2040년 중반에 한창 때가 되는 청소년들이 이산화탄소를 줄이자고 학교 파업을 하고 있다. 2030년대로 예상되는 기후이탈을 늦추거나 완화시키려면 지금이라도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제정신 가진 이들은 10여년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안다. 감수성 민감한 유럽 아이들이 학교 파업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올해 태어난 이들이 스무살이 됐을 때 좋은 환경에서 숨쉬게 하는 게 민족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밥을 먹는 입이나 말하는 입이나 한 가지란 지론은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들어가는 것과 나가는 것이 매한가지란 것이다. 누구나 들어가는 밥은 신경 쓰는데 나가는 것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가는 것도 신경써야 한다. 둘 다 중요하다. 조국 근대화를 얘기하면 ‘촌놈’ 취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온전한 민주주의로 가야 하는데 하나하나 따지고 다 달라고 한다. 그게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나. 주인은 잘못된 것은 시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계속 달라고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줄 때도 있어야 하고 작은 잘못은 덮어줄 수 있다. 그런게 주인이다.

가치나 생활습관, 제도가 민주주의인데 온전하지 않다. 부부 간에도 자기 주장만 하면서 살 수 없다. 남북 문제를 놓고도 투명성을 앞세워 다 밝히자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그런다. 밝히지 말아야 할 일도 있는 법이라고,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얼마나 바뀌었는지.

→ 지난해 2월 28일 22%가 거부하는 가운데 취임했다. 110일 동안 3000여명과 얘기를 했고, 들어도 봤다.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70% 정도 됐다. 날 따르라고 한 건 아니다. 현장 조직을 돌아보며 의견을 나눴더니 합의도가 80%로 올라갔다. 오래된 조직이어서 관성과 타성이 있었다. 시간이 걸리는데 스스로 바꾸는게 가장 확실하다. 힘에 의해 바뀌면 안된다. 용어에 매달리지 말라고 했다. 껍데기를 바꾸니 얼마나 힘들겠느냐. 더 안되는 이유는 난 옳고 넌 틀리다고 마음먹고 말로만 그래서다.

치유나 개량을 할 수도 있다. 개혁이란 단어에 다 집어넣을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압축 성장과 압축 민주주의를 했으니 건강한 몸으로 바꾸자, 함께 하자는 뜻에서 치유라고 하는 게 옳다. 개량도 많이 해서 개혁보다 나은 성과가 축적되면 그만이지 않은가.

땅을 구해서 ‘나눔의 과수원’ 광고를 한다. 5000원 이상 내면 묘목 한 그루를 심는다. 누구나 따서 드세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다섯 개 더 따가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와 나의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새마을운동회에서도 올해 몇십 군데 만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 것이다.

평화운동이라고 복잡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고 아름다운 일을 많이 만드는 것이 진짜 운동이다.

인제 글·사진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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