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밤 창덕궁 낙선재 마당에서 낙선재본 소설 ‘현씨양웅쌍린기’의 한 대목을 연극으로 만났다. 밤하늘에 높이 뜬 달과 별,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무대 삼아 권위적인 가부장제에 맞서는 영웅적인 여성 서사를 담은 공연은 수백 년 전 궁궐 안 왕실 여인들의 욕망과 정체성을 잠시나마 엿보게 했다.
낙선재의 봄밤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궁중문화축전의 일환인 ‘낭만궁궐 기담극장’ 프로그램 덕분이다. 수강재, 석복헌 등 창덕궁 일원에서 펼쳐진 이동형 공연은 봄밤의 궁궐 정취를 만끽하기에 제격이었다. 분명 도시 한가운데 있는데도 담장 너머 소음과 불빛을 까맣게 잊게 하는 초월의 시간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2023-05-0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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