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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들 입과 귀 돼준 美 평화봉사단원들“헬기 사격 똑똑히 봤다…언제든 증언할 것”
“5·18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진실 기억해야”
5·18기념재단 제공
5·18 그때 봉사 활동한 돌린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맨 왼쪽)가 취재를 하는 동안 데이비드 돌린저(맨 오른쪽)와 폴 코트라이트(오른쪽 두 번째) 등 평화봉사단원들이 이를 돕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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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공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최근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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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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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전남 나주 한센인 자활촌 호혜원 앞에 선 폴 코트라이트 전 미국 평화봉사단원. 20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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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 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rubbish)라고 말해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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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던 윌리엄 에이모스. 2020.5.14
5·18 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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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봉사단원들은 5·18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 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 그러나 돌린저는 전남도청에서 하룻밤 머물렀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강요당했다. 평화봉사단은 1981년 돌연 해산되면서 단원들은 한국을 떠나야 했다. 에이모스는 “한국 정부는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광주의 진실을 말하고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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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이머스는 1999년 5·18을 다룬 최초의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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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모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The Seed of Joy)을 썼다. 에이모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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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목격자 데이비드 돌린저
1980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면서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을 목격하고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맡은 데이비드 돌린저. 한국에서 ‘임대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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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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