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지하철에서 좌절하는 임신부들/김상연 사회2부장

[데스크 시각] 지하철에서 좌절하는 임신부들/김상연 사회2부장

김상연 기자
김상연 기자
입력 2017-07-31 17:52
수정 2017-07-3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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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부국장 겸 정치부장
김상연 부국장 겸 정치부장
지하철의 분홍색 임신부 배려석에 몸집이 두툼한 중년 남성이 걸터앉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전화통화에 열중인 모습을 발견할 때 인간의 슬픔은 완성된다.

도무지 임신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배려석을 옥좌(玉座)처럼 차지하고 있을 때 “저기요. 좀 일어나 주실래요?”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임신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아직 배가 부르지 않은 임신 초기 여성들은 ‘임신도 안 한 여자가 왜 저기 앉았을까’ 하는 눈총이 느껴져 배려석이 가시방석이라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저기요. 저 임신한 거 맞거든요?”라고 항변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다고 배려석에 앉은 남성이나 임신부가 아닌 여성을 향해 나쁜 사람이라고 돌을 던지는 것도 정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배려와 양보는 말 그대로 해주는 사람이 해주면 좋고 해주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이 있다면 인간의 선의에만 기대 애매한 개념의 좌석을 만든 정책 당국에 돌려야 할 것이다. 한비자의 법(法)보다는 공자의 인(仁)을 우대한 탓에 근대에 서양에 그렇게 당하고도 그 유전자가 아직까지 살아남아 배려석이라는 부조리를 만든 것은 아닐까.

‘호모데우스’를 쓴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우연한 진화 덕분에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됐을 뿐 감정 면에서는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이라는 얘기다. 동물은 늘 이기적이고 자신의 희로애락에 최우선적으로 관심이 있다. 흔들리는 버스나 피곤한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빈자리가 있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앉고 싶은 게 사피엔스의 본능인 것이다.

수십만년의 생존력을 지닌 이 본능의 위력을 가볍게 여긴 대가는 고스란히 무고한 시민들이 치르고 있다. 임신부는 ‘배려석을 차지한 비(非)임신부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할까 말까’라고, 배려석에 앉은 비임신부 승객은 ‘임신부에게 양보해 줄까 말까’라고 머리를 굴리고 서로를 미워하느라 공연한 칼로리를 소모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지하철에서는 배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연방법에 의거해 노약자에게 우선권이 있는 좌석’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어 있다. 이 때문에 웬만하면 자리가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다. 뉴욕의 지하철도 노약자석에 노약하지 않은 사람이 앉았다가 노약한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린다.

법이나 규정은 비인간적인 것 같지만 불필요한 도덕적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비임신부 입장에서는 아예 앉을 수 없는 자리라면 포기하면 되니까 차라리 속편할 테고, 벌금을 무는 자리에 배가 부르지 않은 여성이 앉아 있으면 다른 승객들이 임신 초기 여성이라고 간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임신부도 눈총을 덜 느낄 것이다.

이렇게 뻔히 보이는 불편함을 개선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서울시 직원들이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서 물정을 모르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시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대다수가 출퇴근 길에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며 펄쩍 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공무원들이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성선설(性善說) 신봉자이거나. 외국인 승객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임신부 배려석에 영어 안내문 하나 붙여 놓지 않은 걸 보면 전자(前者)인 것도 같다. 만약 후자(後者)라면 슬퍼질 것 같다.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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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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