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 경계, 그리고 기울임… 이 모든 것, 아마도 ‘사랑’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통일과 경계, 그리고 기울임… 이 모든 것, 아마도 ‘사랑’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입력 2026-10-20 22:30
수정 2026-10-21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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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헤겔·카슨·이병률의 ‘사랑’

다름 극복하고 통일 이뤄낸 사랑
서로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

너와 나 사이 경계에 막힌 에로스
완전히 하나 될 수 없어서 슬픈 것

그래도 슬쩍 몸을 기울이는 사랑
유리 너머 너를 빤히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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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mini
Gemini


“사랑은 나와 타자 사이에 통일이 이뤄져 있다는 의식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고립돼 있는 게 아니라 나와 타자, 타자와 나의 통일을 자각함으로써 나의 자기의식을 획득한다.”(게오르크 빌헬름 헤겔, ‘법철학’)

어떤 단어는 ‘공간’이 된다. ‘사랑’이 그러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원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은 각기 다른 것을 가리킨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보라. 둘 다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같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사랑으로 묶여 있는 ‘너’와 ‘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둘의 크기와 모양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것’이므로 ‘다르게’ 부르자고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것 있나. 저 다양한 사랑을 그저 사랑이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초대하면 될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구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그 무엇도 사랑이 될 수 있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있다. 머릿속에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랑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어우러지면 되는 것이다.

헤겔은 ‘통일’을 이야기한다. ‘나’와 ‘타자’(他者)가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고 마침내 통일을 이뤘을 때, 서로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사랑한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존재가 개별성에서 말미암은 ‘대립’을 내려놓겠다고 결단할 때 비로소 사랑은 탄생한다. 사랑 없이 사회나 국가가 성립할 수 있을까. 제도는 ‘나’와 ‘너’의 공통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모두가 끝끝내 ‘나’를 포기하지 않는 곳에서는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있다.

“에로스는 경계의 문제다. … 손을 뻗음과 붙잡음 사이, 시선과 응답하는 시선 사이, ‘나는 널 사랑해’와 ‘나도 널 사랑해’ 사이의 간격 속에서 욕망의 부재하는 현존이 활기를 띤다. 하지만 시간과 시선과 ‘나는 널 사랑해’의 경계는 에로스를 창조하는 불가피한 주요 경계, 즉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육체 및 자아의 경계의 여파에 불과하다. 그리고 불쑥 내가 그 경계를 해체하려 하는 순간에만 나는 내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다.”(앤 카슨, ‘에로스, 달콤씁쓸한’)

올해 노벨문학상을 품에 안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의 사랑론(論)은 아름답고도 치밀하다. 박사학위 논문을 개작한 ‘에로스, 달콤씁쓸한’에서 시인은 에로스(사랑)를 명사로 나타내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명사는 어떤 대상의 이름을 고정해 버린다. 그러나 과연 사랑이 무언가로 고정될 수 있는가. 사랑은 한없이 달콤한 것이었다가, 이내 씁쓸해지기도 한다. 사랑은 둘 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며, 무한한 진동이다.

카슨은 사랑이 ‘경계’의 문제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헤겔은 사랑을 통일이라고 했지만, 카슨은 여기에 반대한다. “불쑥 내가 그 경계를 해체하려 하는 순간에 나는 내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하는 ‘나’는 ‘너’와 완벽히 하나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너’를 향해 나아가는 ‘나’는, 경계를 뚫어내지 못하고 다시 ‘나’로 돌아온다. ‘나’를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너’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가 되지 못한 ‘나’는, 끝까지 ‘나’를 주장하는 ‘나’는 오히려 ‘너’에게 닦달한다. 왜 ‘너’는 ‘나’가 돼주지 못하냐고. 이때 사랑은 비극이 된다.

사랑할 때,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은 나를 버리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나’를 ‘너’에게 투영하고 있는 이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그것도 사랑이라 불러야 할까. 이렇게 카슨은 사랑의 이율배반을 폭로한다. 사랑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대단히 슬프고 위험한 것이다.

“어느 가게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 유리창 바깥쪽 면이었다/ 누구를 들여다보려 했을까/ 무엇을 말하려다 무심결에 이마가 닿은 걸까// 안쪽 세상으로 밀어놓지 못한 자국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도 닦인 적 없이 명료하게 굳어 있다 … 나는 그 이마에 내 이마를 대보았다/ 이마를 마주대야만 안쪽의 무언가가 보일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이병률, ‘어느 가게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 중에서)

사랑이 점차 어려워지는 시대에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는 이병률의 시는 사랑의 존재론을 다시금 환기한다. 그는 ‘어느 가게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에서 사랑의 흔적을 확인한다. 유리에 찍힌 이마 자국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어느 얼굴의 개기름과 화장품, 로션이 섞인 무언가일 것이다. 아주 지저분하다. 가게가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닦아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걸 닦아내는 사람이 아니다. 지저분한 자국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거기에 조용히 이마를 한 번 대보는 사람이다.

사랑이 통일인지, 달콤함인지, 씁쓸함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사랑은 그저 여러 모양을 한 사랑‘들’이 모이고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리에 이마를 대고자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몸이 기울어질 것이다. 사랑은 아마도 이 ‘기울임’에 있지 않을까. ‘나’를 포기할 수 없어도, 유리가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완벽히 하나가 될 수 없어도, 그저 ‘너’에게로 슬쩍 몸을 기울이는 것. 그렇게 유리 너머에 있는 ‘너’를 빤히 바라보는 것.
세줄 요약
  • 헤겔의 사랑론, 나와 타자의 통일 강조
  • 앤 카슨의 반론, 사랑은 경계의 긴장
  • 이병률의 시, 유리에 남은 흔적과 기울임
2026-10-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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