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그라피티, 예술 혹은 범죄/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그라피티, 예술 혹은 범죄/이순녀 논설위원

이순녀 기자
이순녀 기자
입력 2018-06-11 23:38
수정 2018-06-12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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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문화수도로 불리는 멜버른에서 꼭 가봐야 하는 명소 중 하나가 호시어 레인이다. 좁은 골목 양쪽 건물 외벽마다 빼곡히 그려진 강렬한 원색의 그라피티로 유명한 거리다. 2004년 방영된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소지섭과 임수정이 처음 만나는 장소로 등장하면서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 2년 전 멜버른을 방문했을 때 찾아가 보니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허름한 뒷골목이 청년 예술가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에 힘입어 활기찬 관광 명소로 변모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벽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그라피티는 반항기 청소년이나 흑인 등 소수 민족의 저항문화에서 출발해 지금은 현대예술의 한 장르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검은 피카소’로 불렸던 거리의 예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 뉴욕 지하철 낙서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팝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공이 컸다. 이들의 낙서 예술은 패션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라피티가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예술적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는 지난 2월 뉴욕 연방법원의 판결이다. 법원은 퀸스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건축물 ‘파이브 포인츠’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라피티 작품들을 훼손한 책임을 물어 건물주에게 총 675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공장 부지였던 이곳은 1990년대 공장 폐쇄 이후 그라피티 성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데 새 건물주가 2013년 고급 콘도 건설을 발표한 뒤 한밤중에 건물 외벽을 흰 페인트로 칠해 버리자 그라피티 작가 21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그라피티도 법으로 보호해야 할 예술작품”이라며 작가들의 손을 들어 줬다.

그럼에도 그라피티는 여전히 예술과 낙서의 경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라피티 아티스트 정태용씨가 지난 8일 밤 서울 중구 청계천로에 설치된 베를린장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과 글씨를 남겨 원본을 훼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베를린장벽은 독일 베를린시가 2005년 서울시에 기증한 것이다. 정씨는 “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주장했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홍대와 이태원, 을지로 등을 중심으로 무분별한 그라피티로 인한 피해가 늘고 있다고 한다. 현행법상 타인의 건물과 공공시설물에 허가 없이 낙서할 경우 재물 손괴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자유분방한 예술의 중요성 못지않게 사회 질서와 상식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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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l@seoul.co.kr

2018-06-1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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