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어느 미국 할머니의 질문/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어느 미국 할머니의 질문/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12-02-04 00:00
수정 2012-02-04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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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0일 미국 뉴햄프셔주 내슈아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아침 나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현장을 취재하러 한적한 마을회관에 마련된 투표소에 들어섰다. 거의 백인 일색인 이 동네 투표소에 웬 동양인이 불쑥 나타나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니 책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 중 한 분이 대뜸 “누구냐.”고 묻는 건 당연했다. 70대로 보이는 할머니는 투표진행 자원봉사자인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온 특파원”이라는 대답에 얼굴에서 경계심을 지운 할머니는 이내 “북한에 20대 젊은이가 우두머리로 등장했는데, 한국인들은 그런 상황을 얼마나 위험하게 보느냐.”, “3대 세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을 물었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거푸 질문을 쏟아내는 할머니의 표정은 내 의견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측은함과 노여움이 절반씩 섞인 오묘한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과 북한의 3대 세습을 경멸하는 심경이 얼굴에 잔뜩 반죽돼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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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워싱턴특파원
김상연 워싱턴특파원
그 전날 저녁 내슈아의 한 중학교 강당 유세장에서 만난 60대 할아버지의 표정은 아예 험악했다.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응원하러 왔다는 그는 다짜고짜 “그 토마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그 할아버지는 “토마토처럼 뚱뚱하게 생긴 북한의 그 애송이 있잖아.”라고 목청을 높였다. 김정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기저귀나 차고 있어야 할 바보(nut)가 지도자는 무슨 지도자냐.”라며 독설을 마구 쏟아냈다. 그 앞에서 차마 공화당 경선 얘기는 꺼낼 수 없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달라진 것은 시사에 관심이 별로 없는 평범한 미국시민들도 “김정일”, “김정은”이라는 이름을 얼추 정확히 발음할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북한을 거침없이 비난하는 세태도 달라진 점이다. 전에는 주로 한국사람의 얘기를 듣는 편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의견을 더 많이 말한다. 그만큼 ‘굶어 죽는 백성 앞에 등장한 칼로리 과잉의 앳된 지도자’에 대한 비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공화당 성향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필립 크롤리 전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해 현직에 있을 때 기자들이 김정은의 방중 가능성 등을 질문하면 “아는 게 없다.”면서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4성 장군인데 어디인들 못 가겠느냐.”고 비아냥대곤 했다.

독재를 혐오해 온 미국의 역사를 알고 나면 이런 태도가 이해된다. 미국인들이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헌법에 넣은 것은 나쁜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재임 1933~1945년)가 높은 인기로 4선에 성공하면서 거의 ‘종신 대통령’처럼 재임하다 사망하자 미국인들은 이러다 왕정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헌법을 고친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이면서도 의회의 권한이 막강한 것 역시 영국 왕정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이런 미국인들 눈에 현대사에 유례 없는 3대 세습과 ‘어린 지도자’의 등장이 어떻게 비칠지는 불문가지다. 중요한 건 격앙된 여론이 축적되고 일반화되면 선거로 뽑히는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공화당 경선 선두주자인 롬니가 지난달 29일 플로리다 유세에서 김정은을 “최악의 지도자”라며 거칠게 비난한 것은 이미 민심의 밑바닥을 읽었다는 얘기다. 역으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새 지도부를 자극하지 않고 살살 다루는 것은, 대선을 앞두고 악재를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와 함께 북한이 새로운 도발을 저지를 경우 미국 국내 정서가 폭발할 수 있음을 직감한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 김정은은 아버지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도발’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책상 위에 미국의 민심은 아버지 김정일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보고서도 하나 올라와 있었으면 좋겠다.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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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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